
콘스탄티누스 11세 (최후의 황제, 함락의 순간, 끝까지 남는 선택)
"지는 게 뻔한데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저는 콘스탄티누스 11세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 이 질문을 계속 떠올렸습니다. 1453년 5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무너지는 성벽 앞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병력도 부족했고 외부 지원도 없었지만 그는 도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조직 개편으로 제가 키운 팀이 해체될 때, 저도 비슷한 선택 앞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최후의 황제, 무너지는 제국을 떠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1405년 2월 8일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마누엘 2세는 1391년부터 황제였지만, 그가 물려받은 건 제국이라기보다 잔해에 가까웠습니다. 한때 광대했던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와 교외, 펠로폰네소스 일부, 몇몇 그리스 섬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황제들은 오스만 술탄에게 조공을 바치고 신하처럼 행동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조공(朝貢)'이란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정기적으로 바치는 물자나 돈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보호비를 내며 생존한 셈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1422년 6월, 17살 때 처음으로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오스만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을 때였습니다(출처: Byzantine Studies Association). 당시 형 요한 8세가 방어를 지휘했고 터키군은 결국 물러났지만, 이 경험은 아버지 마누엘 2세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1422년 9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1425년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 통치 불능 상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펠로폰네소스를 맡아 통치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1430년 중요한 항구도시 파트라스를 라틴 세력으로부터 탈환했고, 1432년까지 아카이아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베네치아가 점령한 몇몇 항구를 제외하고 남부 그리스 거의 전부를 비잔틴 치하로 되돌렸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그가 단순히 운명론자가 아니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가능성이 보이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함락의 순간, 절망적 방어전의 기록
1448년 10월 31일 형 요한 8세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가 황제로 선출되었습니다. 1449년 1월 6일 콘스탄티누스 11세로 즉위한 그는 즉시 터키와 휴전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1451년 2월 술탄 무라드 2세가 죽고 아들 메흐메드 2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겨우 19세였던 메흐메드 2세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처음엔 선의를 가장했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동맹을 찾아 나섰지만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아라곤과 나폴리의 알폰소 5세는 도움 대신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교황 니콜라스 5세는 가톨릭과 정교회의 통합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여기서 '교회 통합(Union of Churches)'이란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교리와 의례를 통일하고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비잔틴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들 대부분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술탄의 지배를 받더라도 교황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1451년 말 메흐메드 2세는 보스포루스 해협 아시아 쪽에 요새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1452년 8월 완공된 이 요새는 두 가지 목적을 가졌습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보급선을 차단하기
- 보스포루스를 오가는 이탈리아 상선에서 관세를 빼앗기
- 육로와 해로 양쪽에서 도시를 완전히 고립시키기
베네치아는 상황을 지켜보며 다른 기독교 세력이 먼저 움직이면 돕겠다고만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형제들인 토마스와 데메트리오스는 펠로폰네소스가 터키군의 침공을 받아 병력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터키군은 의도적으로 그들을 묶어두기 위해 침공한 것이었습니다.
1453년 4월 터키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 도착했습니다.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누스에게 항복을 권했습니다. "평화롭게 물러나면 펠로폰네소스와 다른 영토를 형제들에게 주겠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답장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대목이 가장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조직 개편 당시 떠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그는 떠날 곳 자체가 없었습니다.
1453년 1월 제노바 귀족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자원병으로 도착했습니다. 포위전 전문가였던 그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육로 방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출처: Medieval Warfare Journal). 5월 28일 콘스탄티누스는 시민과 병사들에게 연설했습니다. 공격이 임박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5월 29일 새벽 터키군이 예고 없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6시간 동안 주스티니아니와 콘스탄티누스는 예니체리(Janissaries)를 비롯한 터키 정예군의 맹공을 막아냈습니다. 예니체리란 오스만 제국의 보병 정예부대로, 어린 나이에 징집되어 철저한 군사 훈련을 받은 전사들입니다. 하지만 주스티니아니가 중상을 입고 제노바 배로 후송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부하들은 지휘관이 떠나는 걸 보고 사기를 잃었습니다. 방어선이 흔들렸고, 예니체리는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한편 약 50명의 터키군이 카포르타라는 작은 문을 통해 성벽 안으로 침투했습니다. 그들은 탑에 올라 오스만 깃발을 꽂았습니다. 성 밖 동료들은 신호를 알아채고 환호하며 돌격했습니다. 방어군은 포위당했다는 걸 깨달았고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끝까지 병사들을 집결시키려 했습니다. 전투는 백병전으로 변했고, 가장 치열한 격전은 성 로마노스 문 근처에서 벌어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의 표식을 벗어던지고 일반 병사처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끝까지 남는 선택, 그리고 그 이후
그리스 역사가 크리토불로스는 함락 직후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공포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사람들은 집에서 튀어나왔다가 검에 맞아 쓰러졌다. 어떤 이들은 집 안에서,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학살당했다. 성난 터키 병사들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처녀들이 피로 물든 손과 광기 어린 얼굴의 약탈자들에게 끌려갔다."
메흐메드 2세는 약탈과 파괴를 보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고 전해집니다. "우리가 이토록 위대한 도시를 파괴하도록 허락했구나."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시신은 결국 발견되었고, 머리가 잘려 박제되어 이슬람 궁정들을 순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크리토불로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싸우다 죽었다. 그는 지혜롭고 절제된 사람이었으며, 부지런함에서는 최고였다. 신중함과 덕에서 그를 능가하는 자가 없었다. 정치와 통치에서는 그 이전 어떤 황제보다 뛰어났다. 그는 조국과 신민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고 행하기로 선택한 훌륭한 일꾼이었다."
저는 이 평가가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전략적으로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았습니다. 제가 조직 개편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합니다. 떠나면 편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프로젝트 종료일까지 자리를 지켰고, 팀원들에게 먼저 고맙다고 말했고, 정리 과정에서 누구도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조율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새 수도가 되었고, 이슬람 건축물로 가득 찼습니다. 아야 소피아는 모스크로 바뀌었습니다. 메흐메드는 자신을 이슬람 세계의 챔피언으로 자리매김했고, 그의 제국은 흑해에서 아드리아해까지, 다뉴브에서 타우루스 산맥까지 뻗어나갔습니다. 도시는 1930년 공식적으로 이스탄불로 개명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죽은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는 짧고 불행한 황제 재위 동안보다 사후에 더 많이 기억되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패배한 지도자가 이토록 오래 기억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건 승리가 아니라 끝까지 책임을 다한 모습이었고, 그게 사람들 마음에 남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덕분에, 그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지만 최소한 떳떳하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